
사전을 찾아보면 진로의 뜻은 <앞으로 나아갈 길>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진로라는 말을 들으면 어릴 적 재미있게 읽었던 오디세이가 떠오른다. 오디세이는 다양한 경험, 온갖 역경을 겪으며 앞으로 나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정처 없이 떠돌며 무조건 앞으로 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고향 집이라는 목표를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은유 같다. 오디세이에서 말하는 그토록 그리운 집이란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을 말하는 것 같다. 고향 집은 내면에 숨겨진 진정한 자아의 상징 아닐까?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한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 자신답게 살아야 하는 게 삶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진로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나답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답게 사는 건 어렵다. 나다운 것이 어떤 것인지 대부분 관심 없거나,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팍팍한 현실 속에서 나답게 사는 건 어렵다. 나다운 삶을 위해서는 뭔가 선택해야 한다. 싫은 것을 거부하고, 좋은 것을 선택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자신다운 것이라 여기기도 한다. 그런 태도는 동물보다는 식물에 가깝다. 움직이는 존재는 동물처럼 살아야 건강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남이 시키는 것만 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뭔가를 하는 삶이 좀 더 나은 이유다. 식물이 동물의 삶을 꿈꾸고, 동물이 식물을 삶을 꿈꾸는 것은 식물과 동물 서로에게 좋지 않다. 서로 다른 존재가 자신답게 살아가며 서로 어울릴 때 세상은 아름답다. 세상이 아름다우면 그 속에 살아가는 존재도 행복하다. 나답게 산다는 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세상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무엇이 나다운 것인지 알기란 어렵다. 진로에 대한 최초의 고민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커다란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던 난 7살 때부터 공을 던졌다. 벽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과녁을 맞히기 위해 공을 던졌다. 정확도와 속도가 올라가니 거리를 늘렸고, 과녁의 크기를 줄였다. 진지한 열정이 보였는지 아버지가 글러브와 공을 사주셨다. 그 뒤부터는 더 열심히 더 자주 벽에 공을 던지고 튕겨 나오는 공을 받아냈다. 아무리 잘 던져도 벽에 맞은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흙과 돌로 된 땅 때문이다. 공은 단 똑같이 내게 오지 않았다. 목표를 향해 공을 던지고, 벽과 땅에 맞아 나오는 공을 다시 받으며 나도 모르게 투구 연습, 수비 연습을 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틈만 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공을 던졌다. 아버지는 나무로 만든 야구 배트도 사주셨다. 나는 매일매일 낮이고 밤이고 공을 던지고, 몸을 날려 튕겨 나온 공을 받았고, 배트를 휘둘렀다. 10살이 되었을 때 학교 친구들과 야구를 시작했다. 나의 실력이 출중했다. 4년 동안 혼자서 맹연습을 한 탓이다. 내가 던지는 공이 가장 빨랐다. 정확도도 높았다. 나는 투수가 되었다. 그때부터 야구가 내 인생이 되었다. 집을 나오면 친구들과 야구 경기를 했고, 집에 돌아오면 혼자서 연습을 했다. 밤에도 공을 던지고 기둥에 단 폐타이어를 향해 배트를 휘둘렀다. 가족은 물론 먼 친척들도 내가 야구 선수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나도 야구 선수가 내 꿈이라도 믿었다. 야구처럼 내 인생을 사로잡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다니던 학교에는 야구부가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프로야구가 생겼다. 그때쯤 나는 전교에서 가장 공을 빨리 던지는 투수가 되어 있었다. 다른 반들과 시합 할 때는 ‘정필이 던지기 없기’라는 규칙이 생길 정도였다. 나는 주로 다른 학교와 시합할 때 학교 대표 투수로 활약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야구 시합을 하고 있는데, 나를 지켜보던 한 어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보고 야구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없냐며, 자기 학교로 전학을 와 야구부에 들어오라고 했다. 제대로 가르쳐 준다고 했다. 야구부가 있었던 대신초등학교의 코치 또는 감독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며칠 동안 고민했다. 그토록 원하는 야구 선수가 될 수 있는데도,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사랑한다 생각했던 사람과 막상 결혼하려니, 망설여지는 마음 같은 것이었을까?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고, 야구부라는 미지의 삶이 두렵기도 했다. 단지 야구의 즐거움만 느끼고 싶은 것인지, 고생의 길로 들어서 진짜 야구를 하고 싶은 것이지 헷갈렸다. 무엇보다 변화 자체가 두려웠던 것 같다. 부모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것 같지는 않다. 그냥 혼자 고민하다가 전학을 포기한 것 같다. 내 인생 최초의 진로 고민이었다.
그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알았더라면, 선택의 상황에서 단호하게 결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줄 알았더라면 좋았겠다. 그랬다면 야구 선수 생활을 조금 하다 그만두었더라도 내 삶은 훨씬 행동 중심으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어릴 적에 함께 야구하던 친구 몇 명은 야구 선수가 되었고, 몸이 상해 전전대다, 미용실 보조, 주유소 직원 등이 된 것을 보며 어릴 적 내 결정이 현명했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선택의 상황에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야지, 상황이나 조건을 생각하는 건 현명하지 않은 것 같다. 선택이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다음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선택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가는 것이 배움이고 삶이다. 솔직한 자신의 욕망과 본질적 가치로 만들어진 기준이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선택의 상황에서도 명쾌하게 판단하며 나다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다. 그런 힘을 길러주는 일이 진로 교육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진로 교육은 직업으로 통하고, 모든 직업은 일을 한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기술력과 진정성 두 가지가 필요하다. 기술은 실질적 기술과 형식적 기술이 있다. 학벌과 시험 같은 자격이나 조건은 형식적 기술에 머물 뿐이다. 형식적 기술은 일 잘하는 것, 즉 실질적 직무 역량과 상관없다. 기술을 잘 다루며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는 힘인 진정성을 길러주는 교육이 중요하다. 진정성이란 나다움의 다른 말이다. 교육은 학생들 스스로 나다움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야구 선수의 길로 들어서지 않은 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을 피했던 결과 같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아니라, 나답게 사는 아이가 되는 교육을 받았더라면 선택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을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선택의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결정했는지가 중요하다 본다. 그런 선택의 경험이 계속 이어지는 다른 선택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중요하다. 선택의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을 대하는 태도다. 그건 곧 삶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진로 교육은 단순한 직업 교육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주는 일이다. 그래야 나다움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앞으로 나가는 인생을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암초, 폭풍, 곧 떨어질 연료가 두려워 바다에 둥둥 떠 있기만 하는 인생은 곧 후회한다.
나다운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란 어렵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그 뒤로 지속해서 그 코치가 나를 스토킹하며 스카우트 제안을 하지 않은 걸 보면, 나의 야구 실력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뛰어나진 않았던 모양이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남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기준이 필요하다. 나다움이 나의 기준을 만든다.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부터 길러야 한다. 나와 거리를 두어야 나답게 살 수 있다는 걸 자기만의 방식으로 배우는 과정. 그게 삶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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