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민식, 영화 배우가 아니다. 사진 작가 최민식이다. 그는 1928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고, 일본에서 그림을 공부했고, 독학으로 사진을 배웠다.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진 작가의 길을 걸었다. 부산 지역에서 활동했다. 주로 사람을 찍었다. 그냥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거대한 생태계를 떠받치는 숱한 풀처럼 익명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평범한 이웃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는 2013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회적 무관심을 렌즈에 담았다. 처음 사진을 찍었다고 기록된 1957년에 그는 29살 청년이었다. 무언가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하기 전, 방황하던 스물 아홉 해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뭐 해먹고 살지?’와 같은 우리의 고민처럼, 렌즈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 선택하는 고민의 시간이었을까?
사진 작가에게 피사체란 가치다. 세상의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틀어 영원히 남길만한 가치가 담긴 대상이다. 필름 사진 작가에게 영원의 시간이란 인화지에 묻은 염료의 마지막 분자가 사라지는 시간이겠지만, 디지털 세상의 사진은 기계 몸을 얻어 영원히 살아가는 AI와 같다. 자신이 죽은 후에도 불사의 존재로 세상을 떠돌 자신의 분신에 담고자 했던 가치, 평생 동안 찾아 헤맸던 작가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을 모습을 평생 동안 찍은 이유가 무얼까? 그와의 짧은 만남, 짧은 대화를 모두 기억하지 못하지만, 궁금함에 대한 대답은 희미하지만 분명한 느낌으로 가슴 속에 남았다. 그건 평범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세상의 진실이 담겨 있고, 그 꾸미지 않은 진실이야말로 인류 보편 가치의 핵심이라는 메시지였다. 80년 넘는 세월 동안 스쳐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삶의 진실을 찾으려 했던 늙은 사진 작가의 일관된 진지함에 감동했다. 그의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그의 시선과 그 시선에 담긴 마음을 사랑한다. 그의 사진에는 마음이 보인다. 작가의 마음과 피사체의 마음이 서로 뒤섞여 흑백 사진 한 장을 이루는 빛과 그림자를 빚어낸다. 그의 사진은 내가 본 어떤 사진보다 많은 말을 건낸다. 유섭 카쉬가 찍은 으르릉거리는 처칠의 사진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보도블럭 사이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질경이같은 최민식 작가의 사진이 더 좋은 이유다. 그의 사진을 보면 갈라진 마음의 땅에 비가 내리는 듯하다.
최민식 작가의 말 하나가 떠오른다. 처음 사진을 찍을 때, 낙동강 하구언에 가서 사람도 찍고 새들도 찍기도 했는데, “그때 새들은 아무리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때는 1950년대 중반~1960대 중반 사이지 싶다. 그 즈음만 해도 날아온 철새들은 인간이 자신을 해치는 존재라고 여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도도새가 멸종한 이유는 인간이 자신을 해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야생 동물이 아직 멸종하지 않았다는 건 인간이 자신에게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그 앎이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구의 환경 문제도 개인 통장 잔고의 문제도 상호 작용에 대한 이야기다. 일과 삶도 나와 세상 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문제다. 오래 전 낙동강 하구언 을숙도 갈대밭 사이를 방황하던 초보 사진 작가 앞을 겁없이 거닐던 철새의 행동은 인간이 자신의 진로에 대해 꼭 알아야 할 한 가지를 알려준다.
인간의 진로란 어떤 삶의 길을 걸어갈까의 문제이고, 그 중심에는 각자의 직업과 일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직업을 알아가며 장차 자신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마음을 정하는 일, 정한 직업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일을 진로 활동이라고 한다. 그런 활동을 돕는 교육을 진로 교육이라고 한다. 진로 활동은 교육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 교육의 목적은 인간다운 삶이라고 교육 기본법에서 명시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다움의 전제 조건은 최소한의 경제적 조건이라고 여긴다. 그 경제적 조건의 토대가 바로 직업이다. 이런 관점이면 <교육의 목적 = 인간다운 삶 = 경제적 기반 = 직업>이다. 직업은 일하는 행위로 구성된다. 따라서 교육의 목적은 곧 일이다. 일을 통해 개인적 가치와 보람을 느끼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는 사회적 가치를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하는 과정이 <일>이다. 독특한 관점이나 해석이 아니다. 출근길의 무표정한 사람들, 하교길의 무의미한 간판과 보도블럭처럼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흔하고 너무나 당연해서 무심코 지나치는 교육의 현실적 의미다.
정치 사회적으로 풀어야 할 직업의 문제, 불평등의 문제, 불공정 문제의 근본 원인은 너무 평범해서 그냥 지나치는 일상의 무관심이다. 학생이든 성인이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마음 밑바닥에는 부시럭 소리만 나도 화들짝 날아가는 새의 놀란 심장이 자리 잡고 있는 듯 하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갓 태어난 알몸의 아기새 몸뚱아리에서 자라나는 여린 깃털같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라는 여린 솜털이 자라고 자라 서로 연결되고 떠받쳐 직업과 삶이라는 든든한 날개가 되기까지 기다려줄 인내심이 우리에게는 없다. 자라기는커녕 피부를 뚫고 솜털이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순간 불쌍한 새는 하늘을 날 준비를 한다. 솜털이 힘찬 날개깃이 되기까지의 지루한 시간을 기다릴 줄 모르고, 당장 날 수 없다는 이유로 솜털을 뽑아 버린다. 조금이라도 돈이 되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근사하게 보이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당장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너도나도 경쟁하듯 무관심의 태그를 붙인다. 불에 데인 아이처럼, 먹이를 주러 온 착한 사람의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놀라 날아가는 새처럼 어떤 관심도 돈과 연결되지 않으면 푸드득 날아가버린다. 그렇게 날아간 관심은 다시는 우리를 찾지 않는다. 특히 현실을 반영하는 직업의 세계에서 돈이 되지 않는 순수한 관심이 우리 앞에 겁없이 어슬렁거리는 일은 드물다. 성적, 대학, 직업, 돈과 상관없는 일에 관심을 보일라치면 아이 어른 가릴 것 없이 “정신차려!”라고 외친다. 불침번을 서듯 정신 차리고 살아가라는 외침 앞에 마음은 점점 매말라간다. 매마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회라는 저수지의 물도 곧 밑바닥을 드러낸다. 새들이 떠나간 뒤에 남는 것은 갈라진 땅이다.
직업 선택의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는 직업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이든, 사회에서 외면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직업이든, 단순히 개인적 흥미 때문에 선택하는 직업이든 똑같다. 정확하게 안다는 것과 많이 안다는 것은 다르다. 많이 알수록 정확하게 알 가능성이높아지긴 하지만 정확하게 아는 것과 많이 아는 것은 다른 문제다. 대단한 책을 써야겠다 작정하고 오랜 시간 정보를 수집하며 컴퓨터 하드, 외장하드, 클라우드, 책장, 서랍, 파일함에 데이터를 쌓기만 하는 것처럼 우둔한 짓도 없다. 자료가 쌓일수록, 알면 알수록 방향과 내용을 정하지 못해 고민이 깊어지는 경험은 책을 한 번이라도 써 본 사람은 공감할테다. 인생도 책을 쓰는 일과 비슷하다. 경험과 지식이라는 인생의 데이터가 쌓일수록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갈피를 못잡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잘 산다는 것은 머리에 담긴 정보의 양이 아니라, 정보의 정확성과 연관된 문제다. 투자정보든, 진로정보든 마찬가지다.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는 행위로 구체화되는 인간의 진로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진실성이다. 직업 정보에서 말하는 진실성이란 정보 정확성의 다른 표현이다.
오래 전에 살아갔던 나와 전혀 상관 없는 평범한 사람의 스냅 사진 한 장 속에서 먼저 살다 갔던 이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들, 앞으로 살아갈 이들의 삶이 내 삶과 오버랩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건 진실의 힘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지 마음을 정할 수 있는 힘은 진실에서 나온다. 나의 진실과 상대의 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삶의 가능성, 삶의 새싹이 움튼다. 우리가 자신의 진로와 아이들의 진로 문제를 정말 진지하게 해결하고 싶다면 먼저 진실해져야 한다. 선망하는 직업이든, 비전도 없고 초라해보여 외면하고 싶은 직업이든 진실하고 공평한 마음으로 똑같이 대해야 한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진정으로 알고 싶은 마음이 필요하다. 진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직업 혹은 타인의 직업을 이해할때는 인기척만 나도 날아가버리는 새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 돈만 될 것 같으면 무조건 달려드는 불나방이 되어서도 안 된다. 반대로 돈에 대한 거부감을 세상에 대한 선별적 무관심으로 표출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취향, 사회적 인식과 상관없이 모든 직업에 감춰진 진실을 발견하는 탐험가가 되어야 한다. 직업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도 진실해야 하고, 자신의 직업을 말할 때도 진실해야 한다. 진실에의 추구는 진로 선택으로 인한 간극을 줄이는 유일한 길이다.
가장 처칠다운 사진을 찍기 위해 고민하던 유섭 카쉬는 ‘용서해 달라”는 짧은 말만 던지고 처칠이 물고 있던 시거를 낚아채 빼앗아버렸다. 그리고는 셔트를 마구 눌렀다. 갑작스런 돌발 상황에 감정과 생각이 무장해제되어버린 처칠은 자신도 모르게 가장 진실한 표정, 가장 자신다운 표정을 짓게 된다. 이 사진이 처칠을 대표하는 사진이 되고, 유섭 카쉬가 인물 사진의 세계적 대가가 된 이유는 진실이다. 그의 렌즈는 먼저 가식을 걷어내었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에 깜빡였다. 언제나 그랬다. 직업이라는 피사체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최민식처럼 유섭 카쉬처럼 바라봐야 한다. 진실을 찍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행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진로의 세계도 똑같다. 돈의 렌즈, 사회적 인정의 렌즈, 그럴듯한 정보의 렌즈로 타인의 직업을 바라보면 삶이 점점 꼬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삶이 어떤지 진정으로 알고 싶은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한다. 그런 마음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변화의 힘이다. 그런 진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럴듯한 이상적 가치를 위한 교육이 아니다. 나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접근이다. 현실과 진실은 같은 말이다. 진실이 가려진 상태를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삶의 문제일 뿐이다. 나만의 진로를 만들어가는 힘은 단순하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진정으로 알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최민식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진실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이미 그곳에 있고 그것을 기록했을 뿐이다. 타인의 삶과 나의 삶도 마찬가지다. 나의 진실과 타인의 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돋아나는 싹이 있다. 그 싹을 우리는 직업이라고 부른다.
하정필 스스로진로교육연구소장
답글 남기기